천년의 세월을 품은 겨울, 달마산(達摩山)과 달마고도(達摩古道)를 걷다!
달마산(達摩山, 489m)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지리산을 넘어 월출산을 지나 마지막 머문 곳으로 호남정맥의 땅끝기맥 끝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북평면·송지면 등 3개의 면에 접하고 해남읍으로부터 약 28㎞ 떨어져 있다. 두륜산과 대둔산의 맥을 이어 현산면(머리), 북평면(등), 송지면(가슴)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달마산(达摩山) 이름의 유래는 달마대사(达摩大师)가 1500년 전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이 산에 머물렀다 해서 달마산이 되었다. 달마대사는 인도 출신으로, 중국 선종 불교를 창시한 승려이다.
달마산의 능선의 길이는 불썬봉(달마봉)을 중심으로 관음봉(434m), 떡봉(422m), 도솔봉(418.2m)으로 약 12km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며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암봉으로 형성되어 있다. 겨울에도 당광나무, 구실잣밤나무, 쥐똥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상록수를 볼 수 있으며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렇게 수려한 산세가 유서 깊은 천년 고찰 미황사를 있게 한 것이다. 미황사 대웅전 뒤쪽으로 달마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달마산은 특히 삼황(三黃)인 불상, 달마산 바위, 석양빛의 아름다움과 암봉이 수려한 달마산 자체, 구도의 길에 견줄 만한 달마고도(達摩古道), 불교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미황사 등 보물이 있다.
달마산과 달마고도 산행기는 니체와 메를로퐁티의 몸 이론을 중심으로 쓴다. 홀로 오른 달마산 코스는 제2코스(9.2km, 소요시간 5시간 30분), 숲해설가로서 나무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교통은 광명역(ktx 7시)→광주송정역(택시)→광주종합버스터미널(버스)→해남산정역(택시)→달마산 미황사⇒12시 등산시작∼5시 30분 하산완료.
산과 우리의 몸
우리가 살고 있는 산(땅)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활동을 한다. 산은 그 생명력이 흘러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지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우리 인체의 피와 살 역할을 하는 것이 강과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땅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인체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생명력이 흘러가게 되는 '피(몸)'와 생각하는 능력 ‘지능(마음, 영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몸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뼈와 근육, 살과 피로 구성되어 있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몸은 자아와 타자, 사회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또한 구체적인 실재로 존재하는 몸은 인간 행위의 필연적인 구성요소이며,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차적인 존재 양식이다(임경미, 2018). 니체는 몸을 이성과 육체의 통합으로 보았다. 메를로 퐁티는 몸과 마음은 분리 불가능하므로 감각의 최초 발생 원인이 되는‘몸’을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몸으로 사는 것이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몸으로 의미를 만드는 일이다. 내가 살아 있는 몸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내 자신이 살아 있는 몸을 수행하고 또 세계를 향해 자신을 일으키는 몸이 되어야만 한다.
꿀벌 /폴 발레리 -프랑시스 드 미오망드르에게-
네 가시가 그렇게 가늘고 치명적이라지만, 금빛 꿀벌아, 이 다감한 꽃바구니에 나는 레이스 꿈을 한 겹 둘렀을 뿐. 찔러라, 사랑이 죽거나 잠드는 아름다운 호리병 젖가슴을, 동글고 당돌한 살점에 진홍빛 내가 조금 빛나게! 나는 반짝하는 통증이 정말 필요해. 강하고 깔끔한 고통이 하품하는 아픔보다 낫지! 이 미세한 금빛 경고가 부디 내 감각 일깨우길, 사랑이 죽거나 잠들지 않게끔!
삶의 행위로서 중요한 몸의 일생을 폴 발레리의 시“꿀벌-L'Abeill: 나는 반짝이는 통증이 정말 필요해. 강하고 깔끔한 고통이 하품하는 아픔보다 낫지!”에서 고통은 가끔씩 삶에서 필요한 자극이다. 몸의 가장 훌륭한 점은 오로지 고통스러울 때만 말을 한다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 희열은 험난한 산을 오르는 그 고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임경미, 2018). 니체는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띈다”고 말한다. 몸은 멈춰 있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몸은 나의 정신에 힘을 주기 위해 작동할 필요가 있다. 등산을 통한 몸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에 참여하는 다리가 된다.
■ 달마산(達摩山)산행: 나목(裸木)을 보며 맨몸의 나를 만나다
매년 한 해 끝자락,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나는 항상 겨울 산을 오른다.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를 끼고 1박 2일간 달마산과 달마고도를 걸었다. 누구보다도 추운 겨울을 싫어하지만, 눈과 모든 잎을 떨어뜨린 벌거벗은 몸(裸體)으로 서 있는 나목(裸木)은 좋아한다. 그 이유는 나목에서 나무의 진면목(眞面目), 본질을 들여다보며 나의 맨몸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나목으로서 한겨울을 버티며 새봄에 새롭게 태어나듯, 한 해 동안 내 몸에 쌓였던 모든 오염물질, 헛된 껍데기들과 이별하며 본연의 나로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다. 잎을 버리고 헛된 껍데기를 버림으로 곧 얻음이 가능해진다.
홀로 맨몸으로 나를 만나는 달마산 산행과 달마고도 걷기! 사실 6년 전까지만 해도 설원의 한라산을 좋아해서 늘 한라산을 올랐지만, 최근에는 허리가 안 좋아 높은 산은 잘 오르지 않는다. 이번 달마산 산행 정상에서 한 팀(해남 총각들 세 명)을 만났고, 문바위재에서 미황사로 하산하는 한 중년의 남자를 만났을 뿐이다. 가끔은 복잡한 세계를 벗어나 홀로 산을 올라보라. 벌거벗은 나목(裸木)들의 겨울산, 고독과 나의 맨몸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라. 완벽한 고독 속에서 나의 본질이 드러나고, 나와 맨몸으로 만나는 고독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는 “달아나라,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라고 말한다. 산(숲)과 바위는 그대와 더불어 기품 있게 침묵할 줄 안다. 다시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처럼 되어라. 그 나무는 조용히 귀 기울이며 바다 위로 넓은 가지를 펼치고 있다(이진우, 2021). 고독 속에서 물어보라. 나는 지금 어디로, 왜,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 고독 속에서 던지는 질문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하나의 열쇠다.
참나무(The Oak), 앨프리드 테니슨
네 인생을 살아라, 젊거나 늙거나, 저 참나무처럼, 봄날엔 밝게 타오르는 황금빛으로 살다가;
여름엔 풍성하게 그리고; 때가 되면 가을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아 더 진중해진 색조로 다시 황금빛이 되지.
나뭇잎들이 기어이 다 떨어지고 봐라, 그는 서 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맨몸의 힘으로.
산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만나는 나목들, 눈밭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맨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시의 마지막 행, “벌거벗은 맨몸의 힘”은 나목(裸木)의 적나라(赤裸裸)한 힘인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다(유영만, 2012). 나무는 겨울이 오면서 잎들이 다 떨어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 즉 나목(裸木)이 된다. 제 몸의 모든 잎을 다 버린 나목들은 눈이 쌓여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만 새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혼자 맨몸으로 겨울을 이겨내는 나목의 적나라(赤裸裸)한 힘, 이것이 바로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다.
높이 성장하려면 억새처럼 뿌리를 깊이 내려라
작은금샘에서 대밭삼거리로 가는 길에 억새와 돌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광경이 펼쳐진다. 주변에 작은 나목과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다. 억새는 바람에 흩날리며 꿋꿋하게‘서 있다.’ 억새(벼과의 여러해살이풀), 잡초의 생명력은 줄기의 ‘높이’보다 비바람에도 뽑히지 않는 뿌리의 ‘깊이’로 결정된다.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려야 위로도 ‘높이’ 자랄 수 있다. 억새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 인간은 모두 억새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명체이고, 메를로퐁티는 내가 살아 있는 몸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내 자신이 살아 있는 몸을 수행하고 또 세계를 향해 자신을 일으키는 몸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억새가 꿋꿋하게 ‘서 있음’은 실존,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있음’은 무차별한 그냥 여기에 있음이 아니라, 무언가 능동적으로 ‘행위함’이다. 그는 이것을 ‘존재이행’이며 ‘가능 존재’라고 했다. 가능 존재는 내가 나의 미래로 나를 던지면서 나를 실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임경미, 2018). 억새가 꺾이지 않고 높이 성장하려면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듯 산을 높이 오르려면 깊이 내려가야 한다. 더 높은 산에서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다.
게으른 눈 부지런한 발
우리 몸에서 눈은 빛을 감지하는 시각 기관으로 존재나 형상, 명암, 색 감지, 사물의 모양, 사물의 크기, 멀고 가까움 등을 구분한다. 발은 사람이 서 있거나 이동할 때 바닥을 지지해주는 부분이며 우리 몸의 이동과 관련된 역할을 한다. 눈과 발의 관계, 눈이 주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의 해결은 발이다. 발이 있어도 걷지 않으면 길은 가지 않는다. 걷지 않으면 발은 또 길은 가치가 없다.
눈만큼 게으른 것은 없다. 달마산 정상 달마봉(불썬봉)에서 최종 목적지 도솔봉 쪽으로 많은 암봉들이 펼쳐져 있다. 도솔봉 위로 솟은 중계탑이 보일 듯 말 듯하다. 한 봉우리 넘고 또 한 봉우리, 걸어도 걸어도 도솔봉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할 텐데, 저기까지 언제 다 가지?” 산을 늦게 출발했고 랜턴도 없이 무엇보다 혼자이기에 약간 걱정되지만 부지런한 발을 믿기로 한다. “내 발의 아치 구조는 걷기에 달리기에 손색이 없는 억만 불짜리 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산을 오르고 길을 걸었던가! 그때마다 걷고 걷다 보면 항상 길의 끝에 와 있었잖아!” 자위하며 힘차게 목적지를 걷는다. 희미했던 중계소 탑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달마대사가 머물렀다는 도솔암,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달마대사가 머물렀다는 도솔암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달마대사(达摩大师)는 숭산(嵩山) 달마동굴에서 9년간 벽을 보고 수행하는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功深)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것이나 목표를 세우고 오랫동안 갈고 닦으면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비유로 자주 인용된다.
풋풋했던 시절, 겨울 숭산 소림사의 추억을 꺼내본다. 소림사, 한 스님이 눈이 쌓인 입설정(立雪亭) 앞에서 기도(立雪求法) 중이다. ‘입설(立雪)’은 송(宋)나라 유작(游酢)과 양시(楊時)의 고사로,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성을 뜻한다. 이들이 처음 정이(程頤)를 찾아갔을 때 마침 정이(程頤)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므로 두 사람은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서 기다렸는데, 정이(程頤)가 눈을 떴을 때는 문밖에 내린 눈이 한자 가량이나 쌓여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도솔암 작은 마당, 군데군데 쌓여 있는 눈 위로 바람이 휭 지나간다. 모자를 귀밑까지 다시 끌어 내린다. 암자 옆은 모든 잎이 떨어진 팽나무, 앞은 돌담이다. 하늘과 바다는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다. 황홀하다.
도솔암에도 붉은 기운이 돈다. 돌담을 기대고 노을을 카메라에 담다가 마침 출타 중인 스님도 담아 본다. 그는 도솔암에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가? 나는 소림사에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새로운 나의 길에 대한 물음을 한다. 숲해설가로서 나, 왜 이 길인가, 어떻게 이 길을 갈 것인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본다.
임경미: 숲해설가(한국숲해설가협회), 생교육학박사(숭실대학교) 2024년 1월 16일 씀 <저작권자 ⓒ 참교육신문 Copyright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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