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6] 교육-커먼즈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1/03/16 [15:55]

[윤관범의 우수마발6] 교육-커먼즈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1/03/16 [15:55]

 

교육-커먼즈

 

▲ 소유자가 없으니 이 약수를 길어 먹는 그 누구도 셈을 치를 필요 없다.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완벽한 커먼즈(Commons)인 것이다. (칼럼 중)   © 남정현 기자



내가 사는 곳(영월군 주천면)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꽤 유명한 약수터가 있다. 영월 사람들은 물론 평창과 제천 심지어는 수도권에서도 이곳을 찾는 탓에 새벽이 아니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물 받을 차례가 온다. 영월군에서 관리한다고 하지만 1년에 한 번 수질 검사하는 게 고작일 뿐 주변을 정리하고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소유자가 없으니 이 약수를 길어 먹는 그 누구도 셈을 치를 필요 없다.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완벽한 커먼즈(Commons)인 것이다.

 

커먼즈란 간단히 말해 누구나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일컫는다. 자원이란 표현이 껄끄럽긴 하지만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소유자가 없고 따라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러나 네이버에 검색해 보면 원래의 의미를 다루는 정보는 찾기 힘들고 IT 관련 용어만 잔뜩 넘쳐난다.

 

우리가 얼마나 천박한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틀을 흔들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커먼즈를 네이버가 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의심이 맞다면 분노와 함께 등골이 서늘해진다.

 

요즘 커먼즈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리 입에서 커먼즈가 자주 튀어나온다는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로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타개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커먼즈의 범위가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물이 그렇고 오귀스트 콩트가 공동의 보물창고라 했던 언어에도 커먼즈라 하기엔 자본의 논리가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과연 언어가 경제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어가 사용자의 공간을 결정할까 아니면 공간이 언어를 결정할까? 너무나 당연히 그리고 차별 없이 공짜로 사용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우리는 속절없이 빼앗겨 버렸다. 물론 과거에 비해 접근하기 쉬워진 영역도 있다. 고등학교까지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 중등교육은 커먼즈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비록 국가가 교육을 통제하고 있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 교육은 커먼즈일까? 외고, 과학고, 자사고, 일반고, 특성화고로 울타리치고 계층화하며 교육의 다양화를 내세우지만 다양한 학교 이름만큼이나 교육의 목표도 다양할까? 그래서 과거보다 우리 아이들은 다양한 삶을 그리고 있을까?

 

30년 넘게 학생들과 생활하며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안정된 삶이고 결국 돈이란 것밖에 읽어내지 못한 것은 나의 문맹 때문인가? 그런 아이들밖에 만나지 못한 탓일까? 아무리 눈, 귀 크게 열고 집중해 보아도 시간의 흐름 따라 다양성은 축소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이라지만 변화의 주기만 빨라질 뿐 획일성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공고해질 뿐이다.

 

3년 전 교실을 떠올려 본다. 특목고나 자사고는 안되고 그래도 대학은 가겠다고 모여든 아이들. 가능하면 좀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종교 같은 희망을 갖고 있지만 이미 그들은 자기들의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이라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이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절반 이상이 몸만 두고 교실을 떠난다. 10분이 넘어가면 두세 명만 교사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 이미 그들은 자기들의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이라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이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절반 이상이 몸만 두고 교실을 떠난다. (칼럼 내용 중)  © 남정현 기자



학습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의 교우 관계다. 거의 다 고만고만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이라 다른 삶에 대한 직접적인 부딪힘이 없다. 머리와 가슴이 다 굳어버리기 전에 자기보다 좋은 상황에 있거나 때로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시기에 그들은 아무 자극 없이 아무런 빛의 스펙트럼도 경험하지 못한 채 무채색의 세상을 살 뿐이다.

 

삶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이렇게 협소하고 이리도 얕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어 떠안게 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제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다양한 삶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그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며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삶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떼어 버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육에서 다양성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다양한 사람에 대한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학습이나 진로의 다양성은 학생들이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대부분은 그 원인이 교육 밖에 있다. 대학이 나아가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교육 안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개혁도 눈속임이고 정치가들이나 소위 교육 전문가라는 이들의 체면치레일 뿐이다. 교육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주인 행세하는 정치와 자본을 걷어내는 것이 교육 개혁의 시발점이라 생각한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그동안 꼭 대면해야 할 것들을 피해온 우리. 그 대가로 우린 이제 비대면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교육을 이야기할 때 커먼즈를 반드시 담론의 밑에 깔아야 한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면서 사용자들이, 이해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가꾸고 누리는 커먼즈로 교육은 늘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교육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커먼즈를 외면한다면 앞으로 우린 입과 코는 물론 머리와 가슴도 가리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도 벌써 반 토막이다. 교실에 앉아있을 아이들과 그들을 마주하고 있을 선생님들이 눈에 선하다.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비대면의 세계로 복귀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위해 교사도 학생도 다양할수록 좋다. 여러 모습, 여러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알록달록 교실에 모여 때론 갈등을 겪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며 서로를 배워나갔으면 좋겠다. 비 온 뒤 무지개를 기대해 본다.

 

▲ 거의 다 고만고만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아이들이라 다른 삶에 대한 직접적인 부딪힘이 없다. 머리와 가슴이 다 굳어버리기 전에 자기보다 좋은 상황에 있거나 때로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시기에 그들은 아무 자극 없이 아무런 빛의 스펙트럼도 경험하지 못한 채 무채색의 세상을 살 뿐이다. (칼럼 내용 중)  © 남정현 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교육칼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