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성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얼마나 처벌될지는 형법이나 관련 형사 처벌 규정을 찾아보면 대략 알 수 있다. 범죄에 따른 처벌수위를 정해놓은 것을 ‘법정형’이라고 한다.
살인죄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징역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정형은 너무나도 막연하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아니라면 5~30년의 징역형이라는데 그 중에서 어떤 형이 선고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살인죄가 인정되어도 감형이 된다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될 수도 있고, 가중될 경우 징역 45년의 실형이 선고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는 법정형을 기준으로 형의 종류(사형, 무기, 징역, 벌금)를 선택하고, 법률상 가중, 감경사유를 적용하여 처단형의 범위를 계산한 후 최종 선고형을 정하게 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야 가해자 엄벌을 희망할 것이고, 가해자는 어떻게 해서든 선고형을 낮추는 것이 목표이고 노련한 형사변호사의 역할일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선고형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을까?? 형법 제51조는 형을 정함에 있어서 참작하여야 할 양형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형의 조건’ 중 1, 2, 3호는 범행시점을 기준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다. 따라서 그 해석에 대한 주장, 판단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결국 선고형을 정하는데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4호 ‘범행 후의 정황’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범행 후 정황’에는 범행 직후부터 재판단계에 이르기까지 가해자나 피해자가 보인 태도나 반응인데, 범행을 자의로 중지하였다거나, 자수한 경우, 수사과정에 적극 협조한 경우 등이 해당될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배상을 하여 용서를 받았는지 여부다. 쉽게 말해 ‘합의’를 했느냐가 선고형 결정에서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상 형사상 합의에는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처벌불원’이 포함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에서는 ‘처벌불원’의 의미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라고 장황(?)하게 정의한다.
형사재판에서 가해자가 합의서를 제출했는데 ‘깊이 뉘우쳤는지’,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했는지’, ‘피해자가 합의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였는지’를 판사가 어떻게 알겠는가?
‘합의(合意)’라는 것이 말 그대로 서로 뜻이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돈 많은 가해자는 그렇지 못한 피해자에게 거액의 피해배상을 하고 손쉽게 용서를 받아 처벌도 낮출 수 있다. 반대로 돈 없는 가해자는 피해배상도 못하고 용서받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합의에 있어 자금력 보다 중요한 협상력이 있을까?? 이렇게 보면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법원은 실제 피해배상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선고형 차이를 합리적 차별로 본다.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과정을 본다면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뭘까?’ 라는 씁쓸함도 든다.
특히 가해자는 자력이 없으나 그 부모가 돈이 많다면 피해자로서는 합의를 거절하여 가해자를 엄벌시킬 순 있겠으나, 나중에 민사소송을 하더라도 가해자로부터 피해배상을 받지 못할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처벌이 확정된 상황에서 가해자가 부모로부터 돈 빌려와 피해배상을 하겠는가? 미성년자가 아닌 한, 부모라는 이유로 대신 민 형사상 책임을 지진 않는다. 근대 민법상 자기책임의 원칙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손쉽게 합의를 받아낼 악용수단이 되기도 한다.
최근 뉴스를 보면, 인천 을왕리 음주운전 사망사건에서 음주운전 방조혐의를 받고 있는 동승자가 유족을 직접 찾아가 합의금 6억을 제시했다고 한다. 유족은 합의를 거절했다고 하지만 나중에 민사소송으로 위와 같은 거액의 손해배상을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돈 앞에서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대로 보면, 가해자가 무일푼이라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가족이므로 피해자 입장에서는 형사절차에서 가해자의 가족으로부터 손쉽게 피해변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도 합의거절 후 민사소송을 통해 받아낼 손해배상금이 현실적으로 형사 합의금보다 높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실손 배상이 원칙이고, 위자료 역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금전적 환산가치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 두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운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박원경 변호사
- (현) 법무법인 천명 대표변호사 - 형사법 전문변호사 - (전)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저작권자 ⓒ 참교육신문 Copyright All rights reserved.>
![]()
댓글
|